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찰스 1세 (문단 편집) == 신하에게 목이 잘리다 == 물론 최고 법원의 재판은 뻔한 결말에 뻔한 줄거리로 흘러갔다. 왕은 반역자들에게 재판받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버텼고, 크롬웰이 장악한 법원도 이미 정해진 각본대로 왕에게 참수형을 선고했다. 그나마 의회 인준이라는 형식적인 절차가 남아있었지만 왕의 사형에 반대한 의원들이 일찌감치 감금됐고 나머지 의원들은 크롬웰의 추종자들이었기 때문에 크롬웰 자신의 찬성표를 포함한 고작 59표의 찬성에 의해 찰스 1세한테 사형이 선고되었고 사형 집행이 날치기로 확정되었다. 그나마 왕이었다는 이유로 죄수처럼 강제로 끌려나가지 않고 스스로 사형장으로 걸어가는 것만은 허락되었다. [[파일:external/ncc.phinf.naver.net/0815_img03.jpg]] 1649년 1월 30일, 잉글랜드의 왕 찰스 1세는 신민들 앞에 사형수로 섰다. 사형대는 [[스튜어트 왕조|잉글랜드 왕실]]과 [[귀족/영국|귀족]]들의 연회장인 화이트홀의 뱅퀴팅(Banqueting) 하우스 앞에 차려졌고 군인들이 그를 그 곳으로 인도했다. 거기서 그는 군중들에게 마지막 [[연설]]을 했다. 자신 역시 그 누구보다도 인민들의 자유를 갈망했노라고 주장했다.[* 절대군주가 인민의 자유를 갈망했다는 것이 조금 의아스러울 수 있는 게 찰스 1세가 말한 자유는 지배자의 호의에 의한 자유를 말한 것이다. 이 때문에 당시 의회파들은 이에 대해 진정한 자유란 자신들을 지배할 법을 스스로 정하는 것이라 반론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개인과 군주의 권리는 완전히 다르다면서 의회가 국왕의 통치권을 넘볼 수 없음을 말했다. 연설을 마친 찰스 1세는 집행자의 지시에 따라 사형대에 엎드렸으며 성직자가 명복을 비는 설교를 한 다음 사형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고 말한 뒤 참수되었다. 찰스 1세의 목은 도끼질 한번에 깨끗이 잘렸고[* 아직 [[단두대]]가 발명되기 전이라 목을 집행자가 검이나 도끼로 직접 잘랐는데, 당시 집행자의 칼질과 도끼질이 능숙하지 못했거나 칼날과 도끼날이 날카롭지 못했을 경우 수번을 내려쳐 사형수가 끔찍한 고통을 겪고 저 세상에 가는 일이 빈번했다는 사실을 볼 때 찰스 1세는 운이 좋았다. 실제로 찰스 1세의 할머니인 [[메리 여왕(스코틀랜드)|메리 스튜어트]]는 4번의 도끼질 만에 고통스럽게 최후를 맞았다. 처음 도끼질은 목이 아닌 뒤통수를 찍었다고...--상당히 끔찍하다....--] 집행자는 잘린 머리를 대중들 앞에 높이 들어 처형사실을 알렸다. 이후 당분간 잉글랜드는 왕이 없는 국가, 즉 [[잉글랜드 연방]]이 되었다. 그러나 잉글랜드 연방은 무늬만 공화국이지 [[올리버 크롬웰]]이 의회를 해산해버리고 독재자가 되어 왕이나 다름없는 권세를 휘둘렀고 압제적인 정치를 펼쳤으며 통치를 아들에게 세습하여 실제적으로 의회의 권한외엔 왕정과 차이는 없었다. 처형 당시 매우 인상깊은 유언을 남겼다고 하나 실제 찰스 1세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은 다음과 같다. >짐은 이제 [[잉글랜드|부패한 나라]]에서 [[천국|영원히 변치 않는 나라]]로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간다. 이 세상의 어지러움이여, 안녕히]]. >---- >찰스 1세의 유언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951|출처]]) [[먼나라 이웃나라]]를 통해 알려진 내용[* "짐이 법을 어겼다고 치자. 그러나 신하가 왕을 처벌해도 된다는 내용이 법에 없으니, 이는 신하도 법을 어긴 것이 아닌가? 만일 왕과 신하가 모두 법을 어겼을 때, 왕이 신하를 처벌하는 것과 신하가 왕을 처벌하는 것 중에 어느 쪽의 죄가 더 크다고 생각하는가? '''짐은 후세에도 왕으로 남을 것이지만 그대들은 역사에 영원히 반역자로 기록될 것이다!''''']은 거짓이지만 최후변론의 내용과는 어느정도 유사하다. 찰스 1세는 판결을 받기 전에 최후변론에서 '''"기억하시오. 짐은 당신들의 국왕, 합법적인 왕입니다. 당신들이 짐에게 어떤 죄를 덧씌웠는지 기억하시오...''' (후략)"란 말을 하였다. 처형되는 날 아침 자식들에게도 "이 아비는 죄를 지은 것이 없단다."라는 말을 남기고서 당당하게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찰스 1세가 처형당한 연도는 1649년으로 [[베스트팔렌 조약]]의 다음해이다. 사실 이 때만해도 잉글랜드는 유럽 대륙에 비해 시골 깡촌과 같은 취급을 당했기도 했고, 30년 동안 이어져 온 전쟁([[30년 전쟁]])을 끝낸 베스트팔렌 조약의 영향도 있어서 유럽에선 찰스 1세의 목이 떨어진 것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고 한다.[* 일설로 프랑스에서는 잉글랜드 놈들은 자기들 왕 목을 자른다면서 비웃었는데 정작 본인들도 [[루이 16세|144년 후 왕은 물론]] [[마리 앙투아네트|왕비까지 목을 잘랐다.]]] 그리고 찰스 1세의 처형이 이뤄진 뒤 공화국이 세워진 게 아니라 사실상 크롬웰이 왕으로 등극했고, 또 귀족집단 내부에서 행해진 결정이라 귀족들의 특권에 손상을 주지 않은 점도 영향이 크지 않았던 원인이었다.[* 어차피 이 시대에는 공화정이나 입헌군주제라 해도 현대의 기존으로보면 소수계층만이 참정권을 가지는 괴두정에 가까운 경우가 많았다. [[베네치아 공화국]]이나 [[노브고로드 공화국]], [[폴란드-리투아니아]]도 마찬가지였고, 영국에서 보통선거가 확립된것은 명예혁명으로부터 200년 가까이 지나고 나서였다.] 이 찰스 1세의 처형에 관한 루머가 있는데 영국의 군대 중 해군이 Royal Navy, 공군이 Royal Air Force라고 쓰는 데 반해 육군은 그냥 British Army라고 하는데, [[영국 육군]]은 왕정국가에서 왕의 목을 날린 전과가 있는 군대이기 때문에 Royal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실제로는 영국 육군은 전통적으로 왕의 권한 아래에 있던 다른 군과 달리 의회가 소집을 허가할 때 움직이는 의회 소속이므로 Royal이란 명칭을 쓰지 않는 것이다. 왕의 목을 친 것과 무관하다. 애초에 육군이 반란을 일으켜 국왕을 직접 시해했으면 모를까, 찰스 1세는 '재판'을 통해 사형 판결을 언도받은 것이므로 굳이 '왕의 목을 날린' 주체를 찾자면 친크롬웰파 의원 일부와 법원 쪽이라고 봐야 한다.[* 애초에 의회도 찰스 1세의 권력을 박탈하는 것에 동의했지, 사형에는 반대하는 쪽이 대다수였기 때문에, 제대로 판결을 내렸다면 사형은 가지 않았을 것이다. 후일 찰스 2세가 복수를 쉽게 할 수 있었던 것도 처음부터 처형 자체가 다수 의원들의 공정한 토론에 의한 찬성이 아닌 몇몇 크롬웰파의 각본재판으로 이뤄져 이들만 처형하고 나머지와는 타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그의 왕비인 [[앙리에트 마리]]는 내전이 진행 중일 때 만약을 대비해 미리 자식들을 데리고 국외로 탈출한 후, 남편을 구출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자신의 친정인 프랑스로 돌아가서 수도원에 들어갔다. 이때 어머니와 함께 수도원에 들어갔던 딸 앙리에타(영어명 헨리에타)는 나중에 [[루이 13세]]의 차남 [[필리프 1세(오를레앙)|오를레앙 공작 필리프]]와 결혼했으나[* 어머니 앙리에트 마리의 오빠가 루이 13세니 둘은 사촌이다.] 요절하고 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